闲山:龙的出现

한산: 용의 출현,闲山岛海战,한산도대첩,Hansan: Rising Dragon

主演:朴海日,卞约汉,安圣基,孙贤周,金成圭,金成畇,金香起,玉泽演,孔明,朴智焕,赵在允,李瑞埈

类型:电影地区:韩国语言:韩语年份:2022

《闲山:龙的出现》剧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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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闲山:龙的出现》长篇影评

 1 ) 闲山岛大捷的历史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这才是当时历史的真实记录。

 2 ) 闲山岛大捷 闲山海战 闲山岛战役的历史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3 ) 资料不全啊

2021年要来了,话说卡司阵容怎么不全,海报上还有金香起孔明等演员啊?

导演准备7年,相信是一个好作品。

期待。

鸣梁海战现在还维持韩国票房最高人次纪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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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一如既往,脸可真大啊!

带着瞻仰世界三大元帅之首李舜臣上将军指挥世界四大海战之一的闲山海战之神迹的心情看了这部影片。

虽然逻辑、史实、主题方面可能连盗版读本儿歌三百首都不如,但是论水战的画面效果及剧情的流畅性还远不是上、下赤壁这两坨翔能碰瓷的。

不提机器人一样的男主肩上镶的那两条金龙有多离谱了(别跟我说是充电口),我就想问就凭女主这点姿色你是怎么设计出让身为敌军主将的大boss对她私定终身、处处留情,就算被物理扎心也要一舔到底的剧情的?

你凭什么?!

得亏是氛围不合适,不然我丝毫不怀疑您借机秀一把朝鲜军团欧巴们的无上魅力,安排他们将倭军女眷乃至猴王亲女个个迷得神魂颠倒、欲仙欲死,以至其前赴后继地穿过倭奴男人们的重重封锁将情报送入男神们的怀中。

This safeguarded Ming to the West and reversed the tide of war.一如既往,脸可真大啊!

 5 ) 看到十几分钟,有几张地图实在看不下去了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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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棒子是真的能意淫

其实这部电影很好的诠释了棒子的劣根性,就是意淫。

从朝鲜时代金万重的《九云梦》就可以看出端倪,这种意淫特性是深入骨髓,烂在根子里,并且有历史传承的。

理解了这个,也就理解了棒子整个民族。

这种善于意淫,枉顾事实的特点在棒子身上表现得淋漓尽致。

史实是什么,对它们来说根本就不重要,它们只需要自己意淫一个故事出来达到自我满足就行了。

 7 ) 闲山岛大捷 闲山岛海战 闲山岛战役的历史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其他影评的都讲错了,或者是精神有问题的碍国喷、🐶篮子之胡说十道。

我这才对当时历史的真实记录。

 8 ) 国内的空白让我当历史片来看

万历年间的抗倭援朝战争是很提气的一场战争,我想在银幕上看到李如松、李如柏所率明军最后的神勇,想看到丰臣秀吉时代所谓将星如云的小西行长、藤堂高虎、九鬼嘉隆的狼狈溃败,想看到规模使用火炮的明军炮轰拿火枪穿竹甲的日寇……可惜我们的导演编剧忙着穿越和胡编乱造历史剧,逼得我只能拿韩国的片子当历史片来看了。

李舜臣的几场局部战役被韩国无限拔高,甚至阻止了日寇天津登陆的企图,挽救了大明。

这么任意打扮,熟悉历史的也就一笑了之,你怨不得别人,你自己不屑一顾,只能由着别人说呗!

彼时朝鲜的军制、武器基本和大明一致,语言文字也一致,韩国历史题材电影的服化道都比较认真,因此我也是当历史片来看,努力从韩国将领身上寻找中国历史印记,这不得不说是一个悲哀。

又想起国师的《满江红》,你尊重历史,好好拍个岳家军抗金、十二道金牌召回、风波亭,弘扬爱国主义,不好吗?

 9 ) 除了李舜臣,朝鲜实在拿不出什么可以吹的了。

《鸣梁海战》里斩了个姓来岛的就能吹一整部电影,这个角色甚至在《太阁立志传》和《信长之野望》里都没出现过的,说穿了其实就是个杂兵大将。

然而朝鲜除了李舜臣以外,古代史甚至连一个能拿出来做下艺术加工的人物都找不出来了。

没办法,只能尬吹一下李舜臣了。

就连鸣梁海战,也是日本水师在调动的时候去屁股上偷一下刀。

闲山岛海战也一样,就是趁着日本水师调动的时候打打游记,打完了制海权还是在日本。

也实在是可怜阿。

 10 ) 闲山岛大捷 闲山岛海战 闲山岛战役的历史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我这才是当时历史的真实记录。

《闲山:龙的出现》短评

韩国电影现在真是制作精良

7分钟前
  • 枯藤和老虎
  • 还行

通过此片感受到了韩国对自己的定位:朝鲜是据守亚洲文明门户的民族,因为上到李舜臣下到工匠卧底等朝鲜精英们可歌可泣的抵御了日本的上岸,避免了明朝甚至印度等等其他文明遭到野蛮兽族倭国人的屠戮。。。

12分钟前
  • 四月无
  • 还行

韩国人现在商业片排得真可以,剧情能抓住人,场面也够大。

13分钟前
  • 克罗地亚狂想曲
  • 推荐

震撼

14分钟前
  • 林隐
  • 力荐

就还是可以的吧。就不要说人家剽窃,好歹人家不要说兵器铠甲,连水战也都还原了。咱们大明呢?

15分钟前
  • 土佐脱藩浪人
  • 推荐

最后的海战画面确实精彩。特效不错。紧张气氛也是营造得非常不错。

20分钟前
  • 李湘
  • 还行

啊这,朝鲜拯救大明啊,民族主义大电影。

24分钟前
  • 把噗
  • 较差

李舜臣作为朝鲜的民族英雄,拍电影纪念无可厚非,电影作为艺术创作,有夸张的成分也很正常,我们也有抗日神剧,没必要冷嘲热讽,不过这部电影单从电影拍摄的角度来看,也确实拍的不怎么样,前半段剧情冗长而无聊,群像很多,这也是韩国电影很擅长的,从不同的角度来烘托主要故事,但这部电影是以李舜臣作为绝对的主角的,其实没必要这么多群像,这么处理反而使前半段乱七八糟,节奏也变得极其拖沓,还有最重要的李舜臣也没塑造好,首先是过于神话这个人物,显得不接地气,再加上朴海日发挥失常,整个人物除了会以最帅的角度呈现在镜头里,大部分时候都没什么作用,甚至不如几个配角出彩,这导致整个前半段又无聊又杂乱,后边接近一个小时的海战看似很有噱头,但细节做的还是太粗糙了,经不起琢磨,漏洞太多,最搞笑的是李舜臣盔甲肩膀上的龙,太不用心了

29分钟前
  • 大罗力
  • 较差

输了是不是因为整个日本海军没有日本人。。。

33分钟前
  • 清少纳言
  • 推荐

7分。和《鸣梁海战》一样气势磅礴的大海战,可惜的是李舜臣不如崔岷植版的霸气。比加勒比系列好看。

37分钟前
  • 【King.喆】
  • 推荐

不如《鸣梁海战》

39分钟前
  • Sincerely.
  • 推荐

难看得要命,跟鸣梁海战比差10部长津湖

43分钟前
  • 较差

真的很好一部战争片,被低估了

48分钟前
  • 그 봄은
  • 力荐

《鸣梁海战》的延展版,带移动轨道可伸缩的龙头海龟船冲击,闲山岛海战打败倭寇!朴海日中年版的李舜臣顿了些儒雅和书生气,与崔岷植相比差了一档位!电影并非历史正剧,虽有夸张处理但结尾出近三十分钟的海战场面,还是蛮震撼的!蓝光版本中收录花絮中,有道具和服饰制作的内容!

53分钟前
  • 球友基哥
  • 还行

场面挺大,看着挺过瘾

55分钟前
  • 淘乐妤
  • 推荐

最后一箭朴海日最终兵器弓复刻。有点无语的是海战为了制造氛围简直是搞成回合制了……敌军开炮的时候个个都只会瞪大迷茫的眼睛,不像来打仗的像来观战的😂 卞约汉的表演很令人惊喜。

58分钟前
  • 解压
  • 还行

有第一部作为参照,其实并没有太多新意,而且传说本来应该是露梁以合拍方式扩大这个故事架构,可似乎因为后来双方关系没谈妥,因此其实本片再一次复刻一个故事没有太多的价值,这种故事假如做纯娱乐古装片又搞不起来,自然感觉很鸡肋

1小时前
  • 亢龙无悔
  • 还行

第一部我是为了看崔岷植,第二部没有崔岷植我还有什么看头?过于拖沓时长太久观感不佳

1小时前
  • 不羈的賓周
  • 还行

不反胃的抗日神剧。

1小时前
  • 走光的鹰
  • 还行

卞老师演的胁阪才是主角吧,有一说一,场面弄得可以

1小时前
  • обломо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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